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스니 무바라크 (문단 편집) == 대통령 취임 == [[파일:external/3.bp.blogspot.com/Mubarak1.jpg]] 1981년, [[안와르 사다트]] 대통령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. 무바라크 본인 역시 당시 암살현장에서 피격을 당했으나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손에 총상을 입어 치료를 하느라 고생했다. 외교적으로는 사다트의 [[친미]], 친[[이스라엘]] 정책을 계승해 중동국가 중에선 [[요르단]]과 더불어 이스라엘 편을 드는 두 국가가 되었다(...). 이는 어느 정도 윈윈이 되었는데 이스라엘로선 [[골란 고원]]을 둘러싸고 시리아와 으르렁대는 상황에서 이집트와도 으르렁댈 경우 생길 양면전선을 피할 수 있었고 이집트로서도 [[미국]] 등의 서구 국가들과의 유화적인 상황으로 정권의 유지가 가능했다. 2000년에는 이집트 국경 지역의 [[팔레스타인인]]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[[이스라엘]]이 이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, 이에 이집트 청년들은 거리 시위를 벌이며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라고 요구했다. 그러나 무바라크는 "우리가 [[시나이 반도]]를 해방시켰을 때 너희들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. 너희가 전쟁을 진짜 안다고 생각하느냐?"고 비판했다. 거기다가 2006년에 이스라엘이 [[레바논]] 남부에서 전쟁을 하고 있을 때에도 무바라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. 게다가 [[가자 지구]] 공습 때도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피해 넘어오려는 것에 발포할 것을 지시해 넘어오지도 못하게 했다.[* 실제로 가자 지구 주민들이 넘어오려다 이집트군의 총격을 맞고 사상자가 나오자 포기해야 했다.] 또한 가자 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군에게 식량까지 보내어 팔레스타인과 아랍권, 이집트 내부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다. 그나마 가자 지구에서 땅굴로 거래하려고 오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관세만 받고 묵인했으며 이스라엘의 요구에도 땅굴을 파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. [[대한민국]]과는 1995년까지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이는 제4차 [[중동전쟁]] 때 북한측 조종사들이 이집트 편에 참전한 이유로 [[김일성]]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한민국과 수교하지 않겠다는 무바라크의 뜻이었다. 무바라크는 1980년대와 1990년대 [[내전]]중인 [[사하라]] 사막 [[사하라 이남 아프리카|이남]]의 몆몆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도 무기를 판매하거나 비밀리에 제공하기도 했다. 이집트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체결로 이스라엘을 승인한 후 중동, 북아프리카 이슬람 아랍세계 국가들로부터 왕따가 되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무기 제공, 경제 개발 원조 등으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한 바 있었다. 1989년 이집트가 [[아랍 연맹]]에 다시 재가입하고 다시 아랍 일변도의 외교로 돌아가면서 이 정책은 사실상 허사가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 이집트의 외교적 지분은 어느 정도 존재하는 편이다. 한편 수단과 분쟁지역인 [[할라이브]] 삼각지대에서 2000년에 수단군이 철수하자 이집트군을 파병하여 점령했고, 현재까지 지배 중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